1992년 미국 LA 흑인폭동 사건(한인타운 방위대)

1. 1992년 미국 LA 흑인폭동 사건의 이유

91년 3월 3일. LA에서 과속으로 도주하던 흑인남성 '킹' 이 백인 경찰들에게 둘러쌓여 곤봉으로 무차별 폭행을 당합니다. 이 장면을 인근에 있던 주민이 촬영하여 언론사에 제보하면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이에따라 미국 전역의 여론이 들끓었고, 폭행을 한 백인 경찰관들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었는데, 법원에서는 폭력적인 부분은 인정하나 경찰의 정당한 체포였다며 무죄를 선고합니다. 폭행을 당한 킹은 백인 경찰관들을 용서해줬으나 청각장애인이 되었습니다.

92년 미국 흑인 폭동폭행당하는 킹 

또한 3월 16일에는 한국계 미국인 '두순자' 씨가 운영하는 상점에서 음료수를 절도했다고 오해하여 흑인소녀와 실랑이중, 두순자씨는 권총으로 흑인소녀를 향해 격발하여 사망한 사건이 발생 했습니다. 이 또한 검찰은 무기징역을 구형했으나, 판사는 400시간 사회봉사 및 집행유예 선고를 내려 흑인 사회의 분노를 야기했습니다. 

위 두 사건이 촉발되어 이듬해 92년 4월 29일에 시작되어 5월 4일까지 LA 전역에 역사상 최대 규모의 무장폭동이 발생했습니다. 언론에서는 '두순자' 사건만을 집중 보도하며 한국계 이민자들과 흑인들간의 갈등을 더욱 증폭 시켰습니다.


2. 사건의 주요 내용

폭동을 일으킨 흑인들은 미국계 한국인인 두순자씨에 대한 증오가 한국계 이민지들에 대한 분노로 번지며 한인타운을 집중 타켓으로 설정하여 약탈과 공격을 했으며, 로스엔젤레스 전체 피해액(7억 1천만 달러)중 절반 수준인 3억 5천만 달러엄청난 피해를 받았다 할수 있습니다.

92년 미국LA 폭동 

또한 미국의 백인 경찰들은 할리우드, 베버리 힐즈와 같은 백인들이 많이 사는 부촌지역만을 방어하였고 LA 한인타운에 대해서는 방관 했습니다. 따라서 한국계 이민자들은 자체 부대를 결성하여 진지를 구축하고 폭동에 대비하였습니다. 이 모습이 미국 현지방송을 통해 전국에 생중계 되었습니다.

LA폭동 미국폭동

LA폭동 미국폭동 

또한 한인상점을 지키기 위해 중무장을 한 19살 청년(이재승 씨)이 약탈꾼으로 오인돼 코리아타운을 지키고 있던 방위대의 총에 맞아 죽는 일이 발생 했습니다. 당시 한인들은 미국 경찰과 미국 언론을 믿을 수 없다며 자체 방어에 나서게 된것 입니다.

LA폭동 미국폭동

우선 한국계 이민자들은 흑인폭동에 대비하여 특전사 및 해병대 전우회를 중심으로 방어대를 구축하였고, 예비역 장교들을 중심으로 한인타운을 거점으로 지휘소를 설치하였습니다. 옥상에는 저격수들을 배치하고, 라디오와 무전기를 통한 작전 지휘체계를 구축했습니다.

LA폭동 미국폭동

한인 여성들은 한인 방어대를 위해 음식을 제공하는 등 한인중심으로 똘똘 뭉쳐 흑인 폭동에 대해 방어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 남성들이 모두 군대를 갔다 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 입니다.

LA폭동 미국폭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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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언론들은 한국계 미국인들이 흑인 폭동에 대비하여 진지를 구축한 모습과 옥상에서의 저격수들, 머신건, 자동소총을 무장한 모습을 집중 보도하며 한인타운에 잘못 들어갔다가는 죽음을 당할 수 있다고 보도하여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습니다. 


3. 사건 이후

92년 5월 1일 주 방위군이 캘리포니아 주방위군이 투입되어 92년 미국 LA흑인폭동은 점차 진정이 되었습니다. 사건 이후 한인 교민사회와 흑인 사회는 서로 각종 재단 발생시 서로 도움으로써 관계를 점차 개선해 나갔으며, 한국계 미국인과 흑인들간의 갈등속에서 한국인 출신 입양아들을 보호한 흑인남성의 기사가 보도 되면서 화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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